로버트 맥클로스키 글 ․ 그림, 김서정 옮김 『기적의 시간』
글_조은(시인)
우리 골목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자라 버젓한 사회인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 생명력이 실감난다. 그들이 뛰며 자란 골목에서 지금 눈에 띄는 꼬마들은 고작 서너 명 정도. 그 아이들에게 나는 가끔 동화책을 나눠 준다. 내가 먼저 읽고 난 뒤 ‘이건 읽혀도 되겠다’ 싶은 책을 모아 뒀다가 적당한 때 건네주는 것이다. 과연 그 아이들이 책을 받고 기뻐할지 반신반의하면서……
시인들 중에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쓰는 자들이 몇 있다. 얼마 전에는 이상희 시인이 쓴 『은혜 갚은 꿩 이야기』를 읽었는데, 하얀 생선살처럼 순하고 깔끔한 문장이 돋보였다. 이미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 상상력도 호기심도 촉발하지 못할 것 같은 전래동화에 생생한 활력을 불어넣는 시인의 글쓰기가 퍽 의미 있게 느껴졌던 이유는 구구절절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략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읽은 책이 『기적의 시간』이었다. 8쇄가 발간되도록 내가 이 책을 지금껏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뒤늦게 만난 『기적의 시간』은 한마디로 동화 이상의 책이었다.
두 소녀가 부모와 함께 찾아가 여름을 보내던 아름답고 작은 섬. 그곳에서 있었던 기적 같은 시간을 반죽해 먹음직스럽게 익혀 내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하다. 미국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는 저자 로버트 맥클로스키의 문장들은 순하고, 촉촉하고, 시적이다.
구름이 천천히 커지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세요. 언덕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어두워지는 걸 보세요. 마침내 섬에 있는 우리도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만 저쪽에서는 비가 내 리기 시작합니다. 비는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빗방울 수백만 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물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입니다. 울퉁불퉁한 바닷가로, 베이베리 나무 위로, 키 작은 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도 보입니다. 자, 숨을 크게 들이쉬세요~. 빗방울은 우리 위로 떨어집니다!
이 부드러운 아침, 바깥에는 지난밤 태풍이 남긴 자국들이 누워 있습니다. 부러지고 꺾인 나무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테라스에도 오솔길에도…… 길을 걸을 때마다 발이 걸립니다. 평소 걷던 길을 걸을 수 없지만, 쓰러져 누운 커다란 나무 꼭대기를 탐험할 수는 있습니다. 나무 둥지와 가지 위를 걸을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걷지 못했던 길이지요.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도 아름답다. 어릴 때 읽었던 글이 지금껏 내게 힘찬 에너지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는데, 『기적의 시간』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그런 종류의 책이 되지 않을까, 곳곳에서 확신하게 된다.
어려서는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생략과 암시가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 속에는 무궁무진하다. 이 책에서도 ‘기적’은 이중으로 쓰였다. 먼저 ‘섬에서 보낸 기적처럼 아름다운 시간’ 이 있고, 다음은 ‘엄청난 태풍 뒤 다시 평화로운 현실로 돌아온 기적’이 있다. 이처럼 큰 이야기를 순한 언어로 들려주는 동화를 읽으며 아이들은 밝게 성장하고, 어른들은 삶의 암묵적 질서까지 수용하는 차분함 얻는다. 바로 이 점이 『기적의 시간』과 같은 동화가 전체 연령대를 아우르는 저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