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조대현
내가 최초로 접한 마해송의 작품은 동화가 아닌 수필이었다. 6·25의 전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1957년, 나는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시골 초등학교에 부임한 신출내기 교사였다. 그때 생애 처음으로 월급을 받아보았고, 그 돈으로 제일 먼저 사 읽은 책이 마해송의 『전진과 인생』이었다.
하도 오래되어 지금 그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중 하나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이 「너를 때리고」 라는 수필이었다. 6·25 당시 남쪽 피란지에서, 옆집에 배달된 신문을 먼저 가져다 읽은 아들의 종아리를 때리고 나서 속으로 마음 아파하는 심경을 토로한 내용이었다. 벌써 50년도 훨씬 넘은 지금까지 그 내용이 뇌리에 남아 있는 까닭은 나 자신이 어려서 부친의 회초리를 맞고 자랐지만 정작 매를 든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운가를 그때 처음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받은 감명 때문이었을까. 나도 성인이 되어 자식을 낳아 길렀지만 한 번도 자식에게 매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마해송의 동화를 읽은 것은 그로부터 9년 뒤, 마 선생님이 심사한 신춘문예에서 동화가 당선되고 나서부터였다. 어릴 때 읽었어야 할 동화를 스무 살 중반이 넘어서야 처음 읽게 된 것은 내가 자라난 곳이 워낙 산골인데다가, 6·25 전쟁으로 피란 다니느라고 거의 책을 접하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마해송 동화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것은 역시 「바위나리와 아기별」이었다. 읽을수록 서정적인 환상세계로 끌려들어가는 그 작품을 읽고 ‘아하, 이런 게 바로 동화로구나!’ 하고 감탄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동화가 선생의 나이 18세 때 써진 작품이고, 우리 동화가 아직 전래동화의 개작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에 이런 생동감 넘치고 개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했다는 데 이르러서는 그의 작가로서의 비범함에 새삼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밖에, 「토끼와 원숭이」 「떡배 단배」 「꽃씨와 눈사람」도 내가 감동 깊게 읽고, 요즘 어린이들에게도 꼭 한번 읽으라고 권하는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 그리고 4·19에 이르는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을 동식물의 세계를 빌어 형상화한 작품으로, 그 어떤 경우에도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나라와 겨레가 바로 선다는 교훈을 담고 있어 지금 읽어도 역시 유효한 명작이다.
이런 작품을 통해서 내가 인식한 마해송 선생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지극히 여리고 섬세하지만, 작품세계에서만은 비판과 고발정신이 누구보다도 강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식의 종아리 몇 대 때린 것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고, 외세의 침탈에 그토록 신랄하고 준엄한 풍자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생전의 선생을 딱 한 번밖에 뵙지를 못했다. 1966년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서 성균관대 입구에 있던 자택으로 인사를 갔는데 선생님은 작은 통영 상 앞에 꼿꼿이 앉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중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일 년에 작품 두세 편은 꼭 발표해야 해”라는 격려의 말씀이었다. 그것이 선생의 음성을 듣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 될 줄은 몰랐다.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다. 다행히 지난 2004년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그분을 기리는 문학비를 세우는 데 주무를 맡아 파주 출판도시에 번듯한 기념비를 건립한 것에 조금이나마 보람과 위안을 삼고 있다.